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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도 고통의 시기 보내야 가을에 풍성한 열매 맺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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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남ㆍ신장순씨 부부가 자신의 집 앞에서 밝은 웃음을 짓는다. 부부는 요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
"사과가 그냥 열리는 줄 알았어요. 허허~"
경북 영주 부석면 노곡리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김재남(바오로, 67, 안동교구 영주 휴천동본당)ㆍ신장순(아녜스, 64)씨 부부는 농사의 'ㄴ'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고 했다. 그저 나무만 심어 놓으면 저절로 사과가 열리는 줄 알았다며 껄껄 웃어젖힌다. 40년을 함께 산 부부답게 웃는 얼굴도 '붕어빵'처럼 닮았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는 올해로 귀농한 지 6년째다. 사과 농사를 지으며 건강을 되찾은 김씨는 영세 5년 차 새내기 신자. 은퇴 후 신앙을 얻고 건강도 얻어 새 삶을 사는 그를 10일 안동교구 휴천동본당 안상기 주임신부와 함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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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사과나무. |
#사과도 고통을 겪어야 열려요
서울에서 승용차로 2시간 반 남짓 걸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부의 집은 시골 중의 시골이다. 마을에 접어들자 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길이 나왔다. 근처에 구멍가게 하나 없는 길 끝에 있는 집이 부부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보금자리다.
영주시 농업기술센터에 닭을 가지러 갔다는 남편을 대신해 일행을 반긴 아내 신씨는 아침에 쪘다는 쑥떡과 단호박, 사과와 사과즙을 내놓고는 사과 자랑에 여념이 없다.
"우리 집 사과는 친환경농산물 인증을 받은 사과예요. 사과는 완전 무농약 농사가 어려워요. 하지만 되도록 농약을 쓰지 않아요. 제초제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요. 일일이 손으로 풀 베고 열매를 종이로 감싸 정성껏 재배한 사과예요."
신씨 말대로 사과는 아삭하고 달콤했다. 지난 해 가을에 딴 사과일텐데 아직도 향긋한 맛이 입에 감돌았다. 점심을 먹고 온 터라 자연스레 후식이 된 사과를 먹으니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다.
때마침 김씨가 '센터'에서 새로 보급하기 시작한 닭(일명 맛닭)을 트럭에 싣고 돌아와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 연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한 것이다.
김씨가 집에 오자 부부의 사과 자랑은 사과향기보다 몇 배 더 진해진다. 2006년 귀농한 김씨 부부는 귀농하고서야 난생처음 사과나무를 봤을 정도로 농사에 대해선 전혀 지식이 없었다. 서울에 살 땐 사과 종류가 50종이 넘는다는 것과 사과꽃이 피는 시기, 열매는 어떻게 해야 생기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사과가 탐스럽게 열리려면 꽃봉오리가 보이는 요즘부터 꽃이 질 때까지 무거운 돌을 가지에 매달아 놓아야 해요. 그렇지 않고 나무가 편안하면 꽃이 폈다가도 열매가 열리지 않아요. 사순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것처럼 참 신기하죠?"
사과나무도 고통의 사순(무거운 추)을 보내야만 가을에 기쁨의 부활(열매)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순간이다. 안 신부가 "사과나무만 관찰해도 예수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모두 체험할 수 있네요?"하고 말하자 일행은 모두 공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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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씨 부부가 사과나무 밭에 풀어놓고 기르는 닭. |
#인생 사순에서 발견한 '귀농'
김씨는 편집기자 출신 언론인이다. 한국경제신문 편집부에 근무하다가 1986년 스포츠서울 창간 멤버로 옮겨 편집부장을 지내다 1998년 퇴직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대회 편집이 그의 손을 거쳤다.
퇴직 당시만 해도 김씨는 귀농에 별 뜻이 없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화훼단지를 운영하는 둘째 사위를 도와 꽃을 기르며 일손을 돕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퇴직 2년 만인 2000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적이 있다. 몸은 점점 말라갔고, 몸에 기운도 떨어져 일할 수도 없었다.
"술ㆍ담배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야근하면 새벽 4시에 퇴근해 해장국집에서 동료와 소주를 3~4병씩 마셨어요. 해장국집 주인이 '새벽 해장술을 1인당 3병씩 마시는 사람들은 해장국집 역사상 처음'이라고 놀라기도 했죠."
수십 년 혹사당한 몸은 쉽게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귀농이었다. 현재 집은 그의 동생이 영주에 왔다가 발견한 것이다. 사과나무까지 심어져 있던 9900㎡(3000평) 땅과 집을 2005년에 사들여 이듬해 귀농인의 삶을 시작했다.
귀농을 준비할 당시 김씨 건강은 '인생의 사순시기'라고 할 만큼 좋지 않았다. 처음 마을을 방문했을 때 주민이 그를 보고 "얼굴도 누렇게 떠갖고 뭐하러 생고생하러 오느냐"며 걱정할 정도였다. 뇌경색에 이어 심근경색 수술까지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사과밭에서 일하면서 건강은 점차 좋아졌다.
"귀농하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요. 사과농사를 지으며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도 깨닫고요. 사과밭에서 일할 때면 여기가 하늘에 있는 천국 못지않은 '작은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아내 신씨도 귀농 후 삶에 대해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아침에 된장찌개를 끓이려 해도 시장에 가야 했는데, 여기서는 칼 하나만 쥐면 돼요. 집 주변에 냉이와 쑥과 같은 채소가 넘쳐나거든요. 밭 전체가 밥상이에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삶이죠."
부부는 '왜 그동안 서울에서 아등바등하고 살았을까'하고 반성하게 됐다고 한다. 서울에서 살 때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 한 달을 '버티며' 살았지만 시골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욕심도 없어져 얼굴엔 늘 미소가 가득하고 무엇이든 이웃에 베풀 정도로 마음도 푸근해졌다. 아마 그래서 김씨가 건강을 되찾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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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남씨와 안상기(오른쪽) 신부가 잎사귀와 꽃봉오리가 나기 시작한 사과나무 가지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귀농생활과 신앙생활
김씨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영주시 귀농자 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성공한 귀농인으로 꼽힌다. 귀농을 쉽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다른 지역보다 영주에 귀농자가 많은 편인데, 모두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고 귀띔했다.
그는 "귀농인들이 주로 대도시에서 살다 은퇴하고 오는 이가 대부분인데, 60살 이전에 와야 귀농인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너무 나이 들어 오면 농사 짓기가 어려워 단순히 귀촌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또 마을 주민과 친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웃 주민은 귀농자 자신이 하는 만큼 돌려준다고 보면 돼요. 저는 오자마자 청년 축에 속해 노인회 부회장을 맡았지요. 부회장이 뭔가 했더니 노인정 청소당번이었어요.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어울리며 시키는 일을 하다 보니 (귀농자) 회장을 맡게 됐지요. 농사도 마찬가지예요. 서울에서 살던 습관대로 이것저것 재면서 살면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는 귀농한 지 2년 만인 2008년 하느님 자녀로 거듭났다. 아내는 1991년 세례를 받았다. 미사 때마다 함께 참례한 부부를 부러워했던 아내는 남편의 예비신자반 등록 소식에 "거짓말이지?"하고 되물었을 정도로 기뻐했다.
김씨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이웃 주민과 친하게 지낸 덕분이기도 하다. 인근 부석공소 이영창(프란치스코) 회장과 친해진 그는 서로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자 이 회장이 "나이도 같은데 친구하자. 공소로 놀러 오라"며 외짝교우인 그를 '전교대상자'로 꼽은 것이다.
사과밭에서 하느님 섭리를 깨닫고 건강을 되찾은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 가끔 '고해성사 보기 싫다''성당 가기 싫다'며 아이처럼 투정도 부리지만, 그는 자연 속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그에게는 사과밭이 하늘나라인 셈이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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