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속 안동교구

한 주를 여는 생각

농민이 된 신부 정호경
한상봉 지음
리북 펴냄　

동화작가 권정생은 2005년 5월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로 시작하는 유언장을 작성할 때 그를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고 썼다. 이태 뒤인 2007년 3월, 세상 떠나기 달포 전에 쓴 유서는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로 시작했다.

권정생이 마지막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그 사람, 천주교 안동교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가톨릭농민회를 이끌며 한국 사회 민주화와 농민권익 운동, 환경운동과 한살림운동 등에 큰 족적을 남긴 뒤 미련없이 기득권을 버리고 농부가 된 정호경 신부. 그가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산골 비나리에서 주경야독하며 인간과 사회 동시해방의 길을 치열하게 고민하다 2012년 4월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여정과 그의 생각을 담은 <농민이 된 신부 정호경>이 출간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을 지낸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편집국장이 썼다.

“정 형제! 내가 사제가 된 것은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함께 하려고 한 일인데, 본당 사목만 해서는 개인 구원도 안 될 것 같아 떠나기로 했어요.” 1994년 1월 당시 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로 있던 정 신부가 봉화로 떠나기 전 농민회 정성헌 사무국장에게 띄운 엽서다.

2012년 4월 일흔두 살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출간된 <시편을 묵상하며 바치는 오늘의 기도>에 그가 남긴 기도문의 한 구절은 이렇다.

“주님!/ … 권력자들은/ 입으로는 백성과 정의를 들먹이지만/ 속으로는 불의를 꾸미고 손으로는 폭력을 일삼습니다/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바탕부터 싹수가 노랬을 게 틀림없습니다./ … 건의든 충고든 백성의 바른 소리는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바른 소리를 들으면 독사처럼 공격합니다.

정의의 주님!/ … 불의한 권력자들의 독이빨을/ 부러뜨려 주십시오. … 땡볕에 쪼이는 얼음이나 달팽이처럼 그들이 깡그리 녹아 없어지게 해 주십시오.”

유신체제 말기 정 신부는 자신이 지도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를 깨뜨리기 위해 당국이 날조한 공안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에 걸려 기소당했다. 그 사건은 와이에이치(YH)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사건이었다. 1974년의 민청련 사건과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등장은 그 서막이었다. 최근 정의구현사제단이 다시 예전의 그 전투성을 회복해 가고 있다. 정 신부 말년의 기도는 그 예언이었나.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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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공동체를 갈구했던 우리 모두의 신부

로마 지배하의 유대와 일제하의 조선은 닮은꼴이었다. 1980년대 그리고 지금의 한국 사회라고 거기서 얼마나 멀리 왔다 할 수 있을까.
정호경 신부가 봉화로 간 까닭은 그런 세상을 바꾸는 실험 때문이었으리라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는 ‘개방농정’이라는 미명 아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요구를 받아들여 외국 농축산물 수입을 확대했다. “개 값만도 못한 소 값”이라는 탄식이 쏟아졌고, 1985년부터 전국 농민들이 경운기와 소를 몰고 군·면 소재지까지 나와 시위를 벌이는 ‘소몰이 투쟁’이 이어졌다.

가톨릭농민회를 그 배후로 본 경찰은 성당에 난입해 성모상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이 못마땅했던지 “어떻게 성전에서 불경스럽게 ‘소 값, 개 값, 똥 값’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며 농민들을 나무란 이가 당시 가톨릭농민회 담당이던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였다. 그때 가톨릭농민회 전국 지도신부였던 정호경 신부는 “요즘은 지배하려 드는 신부와 지도신부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며 “지도신부건 담당주교건 농민들 하는 일 방해만 안 하면 족하다”고 했다.

천주교 내 선명하게 엇갈리는 그런 인식 차이, 지금도 변함없어 보이는 뿌리깊은 대립의 역사는 유구하다.

<농민이 된 신부 정호경>(한상봉 지음, 리북 펴냄)에는 ‘예수의 민중사목’(<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농민사목> 분도출판사, 1984)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거기서 정 신부는 예수 당시의 시대상황과 민중의 실상을 이렇게 요약 정리한다.

예수의 조국 유대는 시리아의 오랜 지배에 이어 기원전 63년 로마제국 식민지가 됐다. 로마는 예수가 12살 때 총독을 파견해 직접통치를 강화하면서 납세 거부자 2만여명을 학살하는 등 압제를 폈다. 유대 내부의 가진 자, 배운 자, 힘센 자의 횡포도 로마 압제에 못지않았다. 로마는 유대인 대사제와 70인의 사제장, 원로, 율사로 구성된 공회(산헤드린)를 괴뢰정부 국정에 참여시켰다. 부자 상류계층인 그들은 민족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동족을 괴롭히고 처형하며 집요하게 자신들의 안보와 기득권을 추구했다.

그가 말한 생활공동체는
한 방향으로 살기를 바라는
10여명으로 조직된 작은 공동체다

모든 것을 대립적 관계로 보는
양의 운동은 악순환을 자초한다
모두를 끌어안는 음의 운동은
유기적으로 통일·확장한다
양의 운동만을 고집할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던
민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거기에 가장 거세게 대항한 세력이 열혈당 당원을 비롯한 급진 민족해방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권력 탈취를 통해 민족해방을 쟁취하려 했던 일종의 게릴라들이었다. 그들은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번번이 궤멸당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통쾌하게 복수해 줄 메시아를 대망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그런 상황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예수는 열혈당원의 길도, 메시아 대망 욕구도 모두 부정하고 더 근본적인 길을 걸었다. 민족, 민중해방 모두 민중 스스로 이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극한투쟁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깨어나 그 믿음의 힘이 자라야 누룩처럼 세상을 변혁시킬 것이 아닌가. 예수가 성취하려던 혁명은 그 어느 것보다도 근본적이었다. 인간의 변화, 공동체의 변화, 세상의 변화를 예수는 추구했다. 실상 예수는 정치·경제·사회·종교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그 모두를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기득권 세력은 예수를 처형했고, 예수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뜻을 이루었다. 물론 나중에 기독교는 변질되고 말지만.

지은이는 누구보다 단호하게 유신체제에 맞서 싸웠던 정 신부가 1980년 광주항쟁 뒤 사회운동권 전반이 그랬듯이 깊은 좌절감을 느꼈고, 1970년대식 ‘권익투쟁’만으로는 더는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1984년 한국천주교회 전래 200주년 행사를 계기로, 세상을 바꾸려면 체제뿐만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내적 혁명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것,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생활에 뿌리박은 현장공동체 운동을 통해서만이 우주적 차원의 생명운동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봤다.

로마 지배하의 유대는 일제 식민지배하의 조선 상황과 닮은꼴이지만,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거기서 얼마나 먼 거리에 있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시 닮은꼴로 비치지 않았을까.

정 신부가 그런 상황에서 택한 대응방식은 또 하나의 부록 ‘생활공동체운동-인간·사회의 동시적 해방을 위하여’(<밥도 먹고 말도 하고>)에 정리돼 있다. 그가 말한 생활공동체는 한 방향으로 살기를 바라는 10여명(가능하다면 10여가구)으로 조직된 작은 공동체다. 규모가 커지면 소수의 독점과 다수의 소외, 불통과 불신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 공동체는 개인 차원의 소유욕과 지배욕, 즉 개인악과 싸우면서 동시에 역사적·사회적 구조악(국내외 독점자본 및 독점권력과 지배문화)과도 싸우는 ‘이중 싸움’을 벌여야 한다.

정 신부는 이를 “양(陽)운동을 극복해 가는 음(陰)운동”이라고도 했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대립관계(서구 물질문명의 정복논리 및 약육강식의 논리)로 보는 양의 운동은 악순환의 굴레를 자초한다고 봤다. 이에 비해 모두를 끌어안고 일치시키는 음의 운동은 마치 건강한 세포처럼 철저히 독립적이면서 유기적으로 통일·확장한다. 또 차별성만 강조하며 모두를 매도하는 양의 운동은 분열·축소·파괴 경향을 가진다. 양의 운동의 과제 및 전략·전술은 획일적·일회적·구호적인 데 비해 음의 운동에서는 다양하고 지속적이며 생활연대적이다.

정 신부는 이를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는 장자의 개념으로도 얘기했다. 열혈당원의 급진 해방운동도, 볼셰비키식 혁명운동도 결국 양의 운동적 한계로 실패했다. 정 신부는 1987년 6월항쟁 뒤 찾아온 ‘서울의 봄’이 김영삼·김대중 분열에 따른 노태우의 어부지리로 끝난 것, 그를 또한번 절망케 한 그 사건도 운동권 내 양의 운동 방식 탓으로 본 듯하다.

“양의 운동만을 고집할 때 노동자 안에 있는 지식 및 지식인에 대한 선망 및 열등감이나 자본 선망을 극복할 수 없고, 루쉰의 ‘아큐’, 프란츠 파농이 말한 흑인의 백인 선망,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던 민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적 정권들의 한계도 그런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94년 정 신부가 모든 걸 뒤로하고 경북 봉화로 내려간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음의 운동을 위한 생활공동체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직접 집을 짓고 20년 가까이 농민 사제로 2000평 땅에 열심히 농사짓고 사람을 만나고 글도 쓰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