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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침묵

시몬이메일

하느님의 침묵

 

신비로운 나 자신을 포함하여 온갖 신비로운 자연현상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운 대우주를 바라볼 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신 것은 분명한데 우리는 그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한마디의 음성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평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문뜩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하는 의혹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어왔고, 그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인류가 고통과 불행을 겪어온 게 사실이다. 전쟁이 없다 해도 우리 사회에는 각종 법죄행위 등 온갖 사회악이 난무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행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인류사회에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수시로 각종 전염병과 질병이 발생하여 수많은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각종 불행한 사태에 직면할 때마다 절대자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 제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빌고 기도하고 바라도 하느님께서는 계신지 아니 계시는지, 이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가시적인 도움의 손길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왜 하느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

 

성경에는 하느님의 인류사랑에 관한 말씀이 도처에서 나오는데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온갖 고통과 불행을 말끔히 씻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과연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인가?

 

이 점이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의문이요 궁금한 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커다란 의문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해답 혹은 이해를 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이 감히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왜 하느님께서 침묵만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긍정적인 이해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하느님에 대한 신뢰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심을 갖고 하느님께 온전한 의탁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긍정적인 차원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분처럼 침묵만 하고 계실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도출하기 위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번째 관점: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결정한 다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는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문제조차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자유가 부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에 관한 집회서의 말씀을 보자.

 

(집회서 15,14-17)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이 당신께 돌아와 당신에게 의탁하고 당신의 길을 따라 걷고, 그래서 모든 영혼이 천국에 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게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계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강요하지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당신 맘대로 조종하지도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뜻일 게다. 다만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이를 두고 인간에게 부여된 그 무시무시한 것은 선택 그리고 자유다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너무 냉정하고 매정하신 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없으신 분이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 자유간에는 함수관계가 성립된다는 사실 즉, 완벽한 사랑은 완벽한 자유를 인정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왜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완벽한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듯 싶다.

 

또한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만 부여하고 인류에게 무관심하신 것은 절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신비스런 인간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성장하고, 자신의 한생을 살아가고, 결국 다시 돌아갈 때까지 어느 한 순간도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탄생과 삶 또한 하느님의 섭리하에 움직이는 자연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삶에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풍부하게 하사하고 계시며,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잘못을 꾸짖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신다.

하느님 앞에서 진실되게 걸어가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치고 있음을 깨달은 경우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집회서 34,17-20)

주님을 경외하는 이의 영혼은 행복하다.

그는 누구를 의지하는가? 누가 그를 후원하는가?

주님의 눈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 위에 머무시니 그들에게 든든한 방패요 힘 있는 버팀목이시며 열풍을 막아 주는 쉼터요 한낮의 뙤약볕을 가려 주는 그늘이시다. 또 비틀거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들어 높이시고 눈을 밝혀 주시며 치유와 생명과 복을 내려 주신다.

 

(시편 34,8-11)

주님의 천사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출해 준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이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어라.

사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 하나도 모자라지 않으리라.

 

(바룩서 4,27-29)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이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를 기억해 주시리라.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한평생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고 그래서 늘 주님의 도우심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왕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시편 18,21-25)

님께서 내 의로움에 따라 나에게 행하시고 내 손의 결백함에 따라 나에게 갚아 주셨으니 내가 주님의 길을 지키고 나의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모든 법규를 내 앞에 두고 그분의 규범을 내게서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이네.

나 그분께 결백하게 지내왔고 죄에 떨어질까 조심하였네.

주님께서 내 의로움에 따라 나에게 갚아 주셨네. 그분 앞에서 지켜온 내 손의 결백함에 따라 갚아 주셨네.

 

하느님은 결코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무엇이든 너희가 맘대로 하고 행위에 대한 책임은 너희가 져라라고 몰인정하게 내팽개치고 모른척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인류를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불행한 일들 인간사회에서 생기는 전쟁이라든가 각종 범죄행위 등 사회악 - 은 모두 우리 인간들의 탐욕에서 비롯되는 악행이라고 할 수 있다. ,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우리의 고귀한 자유의지를 잘 못 행사한 데서 비롯되는 결과인 것이다. 인간사회의 온갖 질병이나 전염병의 발병도 인간들의 잘못된 행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인간사회의 온갖 고통과 불행을 보시고도 왜 침묵만 하고 계시냐고 원망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방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두번째 관점: “모른척 하시는 하느님?”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가 밖에 나가서 나쁜 짓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무서운 얼굴을 하고 현관 앞에 서 계신 아버지와 다 아시면서도 모른 척 서재에 틀어박혀 계시는 아버지 중 누구에게 아이는 더 고마움을 느끼겠는가?

 

당연히 모른 척 눈감아 주시는 아버지일 것이다.

 

우리 인간들과 하느님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소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살아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중 하나는 바로 불완전성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 8,3-1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기 시작 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하느님 앞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양한 욕망 속에 파뭍혀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수시로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죄까지는 아니라 해도 떳떳하지 못한 행실이 종종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도로에도, 공원에도, 건물 밖에도, 건물 안에도 곳곳에 CCTV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다. 주로 범죄예방을 목적으로 국가 혹은 개인이 설치한 것들이다.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CCTV가 아무리 많아도 신경쓸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누군가에게 감시받는 것이니 불안하고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신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보자.

 

(집회서 23,16-20)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운 욕정은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으리라.

간음을 저지르는 남자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볼 수 있으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사방의 벽이 나를 숨겨 주니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내가 걱정하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도 내 죄악들을 기억하지 못하시리라.’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그는 주님의 눈이 태양보다 만 배나 밝으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의 눈은 사람들의 온갖 행로를 지켜보시고 숨은 구석까지 낱낱이 꿰뚫어 보신다.

 

(잠언 5,21)

사람의 길은 주님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태양보다도 밝은 눈은 아니 계신 데가 없으니 우리 인간들의 행실은 하느님 앞에 낱낱이 모두 들어나 있다는 말씀이다.

 

마치 우리 인간이 사는 곳 어디에나 심지어는 우리의 침실 안에까지도 하느님께서 보고계시는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범죄행위까지는 아니라 해도 혹시 떳떳하지 못한 행위 혹은 부끄러운 행위를 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 나의 행위를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 인간들이 마음 편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만일 감시용 CCTV가 세상 모든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볼 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온갖 행위를 다 보고 계시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우리 인간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도록, 마치 아니 계신 분처럼 느끼지조차 못하도록 완벽히 침묵하고 계신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닐까.

 

마치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 온 아들 앞에서 모습을 숨겨 아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해주고 나중에 아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아버지 앞에 나와 용서를 빌기를 기다려주시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요, 참으로 고마우신 아버지이듯이 말이다.

 

결국 하느님의 침묵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느님의 침묵에는 그러한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오해하여 우리는 가끔 하느님의 침묵을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고 섭리하시며 늘 관심을 베풀고 계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수시로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는 당신의 현존하심을 인간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도록 완벽히 침묵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은 무섭고 두려우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아빠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아닐까.

 

(이사야서 55,8-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시편 37,1-5)

너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불의를 일삼는 자들 때문 에 흥분하지 마라.

그들은 풀처럼 삽시간에 스러지고 푸성귀처럼 시들어버린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1,1-3)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