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역사_역대 교구장

천주교 안동교구
역대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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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레나도 주교
1929. 9. 2
프랑스 오클레앙시에서 독실한 신자 가정의 5남매 중 차남으로 탄생
1947
오클레앙 '쌩끄로아' 고등학교 졸업
1950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951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대학원
1953. 6. 29
사제서품
1954
한국에 파견되어 대전 대흥동천주교회(주교좌)에서 10년간 보좌로 사목.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역임
1967. 9. 3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피선
1969. 5. 29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안동교구 설립과 동시에 주교로 임명
1969. 7. 25
주교서품식 및 초대 안동교구장 취임
1990. 12. 2
안동교구장 퇴임.
새 교구의 정비
교구 설정 당시 18개 본당 175개의 공소가 있었으며, 성직자는 주교 1명에 외국인 신부 17명, 한국인 신부 2명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봉 주교는 새로운 교구에 당시 막을 내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새로운 교회상의 모습에 따라 교구를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대부분이 피폐한 농촌지역인 안동교구에서 초창기에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사제수급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였다. 두봉 주교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내적으로는 사제들에게 가난의 영성을 강조하였고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외국교구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제단의 형제에를 강조하고 본당간의 유대강화와 작지만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모습의 교구 본당을 만들기 위해 수 차례 사목서한을 각 본당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1970년 교구를 5개 지구로 나누면서 한국 최초로 지구별 사목회와 공동사업추진이라는 형태로 드러났고, 1971년도에 사제단의 미사예물 공유화라는 이름으로 사제단의 형제적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다.
초창기에 사목 전 분야에 있어서 조직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교구와 교구 내 각 본당은 여러 차례의 사목서한을 통한 조직화와 방문을 통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고, 이와 더불어 지역내 주민들의 여러 가지 필요성들에도 귀를 기울여 이미 설립된 한국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전문학교에 이어 상지여자중학교가 1972년도 설립되었다. 또한 농어촌이란 지역 사정에 부합한 경제적 발전을 위해 각종 신용협동 조합이 설립되었고, 1972년도 어민들을 위한 해성협업회가 설립되면서 어업의 현대화와 가난한 어민들의 삶의 희망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하였다. 유교적 뿌리가 깊은 안동지역에서 교회와 유교적인 사회와의 대화와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복음전파를 이루기 위하여 1973년 안동 동부동에 문화회관을 준공하게되었다. 그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공간은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서 각종 회의장과 극장 강당 숙박시설의 복합건물 안에 또 성당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었다. 한편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아 교구장의 방침에 따라 1973년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이 설립되게 되었다.
농촌 사목과 정의평화 운동
초창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안동교구 사목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농촌 사목이었다. 더욱이 7-80년대의 정지적 암흑기를 지내면서 안동교구는 안동교구 지역의 기반이 되는 농민들의 문제와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해 형제적 우애와 사목자적인 사랑으로 동참하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몸부림을 함께 했던 것이다.
이런 정신은 1976년 3 · 1절 명동성당 기도회 사건을 필두로, 1977년 농민, 근로자, 양심수를 위한 안동 동부동 성당에서의 기도회 등 민주화와 농민들을 위한 수많은 기도회와 미사 거리행진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교구 창립이래 농촌 본당을 사목하는 농촌교구로서 농민의 권익보호와 농촌을 살리기 위한 운동에 앞장섰던 안동교구에서는 교구청 사목국 내에 농민 사목부를 설치하고, 공소를 중심으로 현지에서 농민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됨으로써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권익보호에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펴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한국 역사에 뚜렷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1978년도 이루어진 일명 ‘오원춘'사건 이었다. 당시 농민회 영양군 청기 분회장이었던 오원춘 알퐁소 씨가 영양군에서 권장한 감자경작에 극대한 피해를 농민들이 보게 되면서 청기분회를 중심으로 당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오원춘씨가 영양에서 납치되어 포항과 울등도를 거쳐 올라왔고, 이 사실을 확인하고 항의를 하던 중에 당시 사목국장인 정호경 신부와 농민회 총무 정재돈씨가 연행 수감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이후 이 문제는 전국 교구에서 기도와 단식이라는 형태의 시위로 확대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갔고, 마침내 외무부에서 두봉 주교의 자진 출국명령에 이르게 되었다. 두봉주교의 추방은 교황청과 한국 주교들의 면밀한 요청으로 철회되었고, 오원춘씨는 몇 차례의 재판 끝에 실형을 구형받았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후 최규하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를 해제로 석방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마침내 교구에서는 1981년에는 지역농민들의 농촌문제 연구와 개발 및 농민운동의 집회와 강연회 장으로서 농민회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수 차례 소 값 피해 보상요구, 조합장 직선제, 농가 부채 탕감, 민주 농협 및 의료보험 통합제 쟁취 등의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여성농민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 가톨릭 농민회의 운동 방향이 생명의 농업으로 변화함에 따라 교구 내에도 이에 부흥하는 농민운동의 형태가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농민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들의 생활협동조합의 형태를 띠는 “생명의 공동체" 운동이다. 생명의 공동체 운동은 소공동체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한국 천주교에 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시도된 소공동체 운동이기도 하였다.